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에 관한 전설이나 떠도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리고 술에 관한한 자칭 내로라하는 주당(酒黨)이나 주신(酒神) 또한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촌놈이라 어릴 때부터 술을 접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들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새참 심부름을 하면서 일찍 술을 알게 되었지요. 새참은 두부김치에 막걸리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이 담긴 큰 주전자가 무겁기도 하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 모금 두 모금 맛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 힘든 줄도 모르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조금 더 커서 농사일을 돕거나 땔나무를 할 때는 동네 형들이 주는 술을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되었지요. 사실 어르신들도 담배는 어르신과 마주앉아 피는 것을 금기시하셨지만 술 마시는 것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주도(酒道)를 배운 것은 열일곱 살이 된 해였다고 기억됩니다. 할머니 제사가 끝났을 때 아버지가 “사내자식이 열일곱이 되었으면 술을 좀 해도 되지” 하시며 음복을 권하셨습니다. 짐짓 놀란척했지만 아버지도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고마운 것은 술도 음식이라 나름 주법이 있다는 말씀을 들려준 것입니다.

윗분께 잔을 올릴 때는 오른손으로 잔을 먼저 올린 다음 술을 따라 올리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리고 윗분이 주실 때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고개를 약간 돌리고 마시되 다 마시지 않을 때에도 잔에 입을 대었다가 잔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지요. 잔을 부딪칠 땐 윗분 잔보다 아래로 하고 반드시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예의라고 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 자리에서 이동해서 술을 권할 때에도 반드시 오른쪽으로 가서 오른손으로 잔을 드리고 술을 따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왼손으로 술을 권하는 것은 술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옛날 선비들은 마을 정자에 모여 시 한수와 노래 한 자락에 술 한 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때로 먼 산이나 강 자락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풍류를 즐겼다고 하지요. 그러다 아는 선비가 지나가면 불러 함께 술자리를 하는 게 상례였던 듯합니다. 그때 그 선비가 인사를 나누고 한 순배가 돌아가면 자리를 떠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겠지요. 그럴 때 잔을 왼손으로 건네면 그 잔을 받고는 자리를 뜨는 게 당연한 관례였다고 합니다. 왼손으로 권하는 잔의 의미는 자리를 떠나라는 뜻이 담긴 겁니다.

거지도 신분이 있다고 합니다. 왕초 거지는 움막집 안에 앉아 동냥 얻어오는걸 먹으며 편히 지내지요. 내초 거지는 왕초 시중을 들면서 지내고 초초 거지는 다른 무리들로부터 거처를 보호하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신초 거지가 당연히 동냥을 얻어오는 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이지요. 가끔 그들도 폐휴지 등을 판돈으로 고기를 사다 굽고 회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왕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에겐 왼손으로 잔을 권한다지요. 그러면 절대로 잔을 받지 않고 더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는 합니다. 거지도 왼손 잔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이런 걸 모르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술은 잘 마시면 약이 되지만 잘못마시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술 먹고 실수하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지요. 술자리를 통해 사람의 근량을 달아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몰래 몰래 술을 마시던 저에게 일침을 가하며 정곡을 찔러주신 것이지요. 주도(酒道)에 관한 스승이 아버지였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고 그 덕분에 어느 술자리에서든지 결례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저 역시 아들 녀석이 대학 입학 무렵 아버지의 주도(酒道)를 그대로 전수했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지만 아는 것이 힘입니다. 주도를 제대로 아는 것도 인생살이에 좋은 보약이 될 것입니다.

홍승표 사장  aa57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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