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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묘(精忠廟) 국수봉(國守峰) 충정사(忠貞祠)정기성 교수(경영학박사, 광주문화원 광주학연구소장)
정기성 교수 | 승인 2023.01.19 17:25

날씨는 혹독한 추위였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에 은거한 인조를 치기 위해 혼전하고 있다. 이미 포위당한 조선의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얼마나 추웠는지 인조는 옷도 못 갈아입고 취침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 참혹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는 전투가 벌어진 곳, 쌍령고개이다. 이 소위 쌍령전투에서 순국하신 장군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 경상좌도 안동영장 선세강(宣世綱) 등 4명의 위패를 봉안)을 모신 곳이 정충묘이다.

그리고 그 산의 동북쪽으로 쌍령동 위에 있는 봉우리가 나라를 지키려는 국수봉이다. 그 국수봉에서 보이는 곳에 충정사가 있다.

이 전투는 처참하였다. 시작과 끝은 이러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인조 14년 병자년 음력 12월 8일부터 정축년 음력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3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이루어진 조선에 대한 청의 침략 전쟁이다.

1627년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종전 후 10년 만에 침략한 전란으로서 임진왜란 이래 동아시아의 판도를 다시 한번 크게 뒤바꾼 사건이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 (丁丑下城))으로 당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전쟁이다.

정축하성이란 1637년 2월 24일 당시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공격이기지 못하고 강화 조약을 맺는 것을 일컫는다.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예를 칭한 일로 흔히 삼전도의 굴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나라군은 기병중심의 편제로 그 진격 속도가 빨랐다. 조선군은 전쟁준비 조차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한산성에는 1만2000명의 병사와 수만의 백성들이 퇴각했으나 이를 먹여살릴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농성이 계속되자 물자는 떨어졌고,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 인조조차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 상황에 이르렀다. 겨울철의 추위에 얼어 죽는 이까지 발생했고, 굶어 죽는 이들 또한 속출했다.

이후 2월 16일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까지 함락됐고, 19일 인조는 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 결국 인조는 22일 항복을 결정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59일만인 2월 24일(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치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세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청나라의 예법으로 인조는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오도록 머리를 찍으며 절하는 수치를 당한다.

이 전쟁의 한편에 쌍령전투가 있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인조는 근왕병을 청한다. 누가 성 밖을 나가야 하는데 서흔남이 나간다.

그는 청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똥까지 싸서 묻히며 그들을 속이고 왕의 밀서를 전한다. 이제 많은 관군이 몰려온다.

약 3만의 군사가 곤지암에서 쌍령까지 와서 전투를 준비하였다. 이제 남한산성으로 가면 된다. 그래서 쌍령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청군은 기마병이다.

이들은 기습하여 조선군을 친다. 조선군은 조총을 사용하였는데 화약이 오늘날과 달라 졸지에 한 번 쏘고 준비하는 중 전사한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병사가 사망한다.

이때 사망한 조선군을 이끈 장수들을 참배하는 곳이 정충묘이다. 이들은 국가를 수호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한다. 그 수치를 당하면서...

결과는 참혹하였다. 이들은 이름도 없이 전사하였다. 광주시는 초월읍사무소에서 쌍령고개 방향에 있는 정충묘를 2008년 4월 21일 광주시 향토문화 유산으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 갈 때 자청하여 배종한 정뇌경(鄭雷卿)이 있다.

그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으로 세자를 배종하여 중국 심양에 들어가 세자의 왕재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때 정명수(鄭命壽)라는 괴이한 청나라 역관(譯官)의 악행을 보다 못해 그를 제거하려고 계책을 세워 실행하였으나 오히려 모함에 걸려 청나라에서 참혹하게 순절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유가족에게 삼학사의 유가족과 동등하게 대우하였고 종2품, 의정부좌찬성에 중직하고 정조(正祖)때에는 그의 신주를 불천위로 할 것을 허락하고 충신정려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를 모신 곳이 장지동의 충정사(2008년 4월 21일 광주시 향토문화 유산지정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정충묘에서 쌍령전투를 기리는 정충묘 제례는 광주문화원 주관으로 음력 1월 3일에 열린다. 이 연결된 스토리가 광주시 역사의 한편이다. 

정기성 교수  webmaster@tg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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